80~81년 F1은 윌리엄즈의 해였다. 페라리와 로터스를 선두에서 밀어낸 윌리엄즈는 컨스트럭터즈 타이틀 2연패를 거두며 강팀의 반열에 올라섰다. 윌리엄즈 시대를 개척한 드라이버는 앨런 존스와 카를로스 로이트만. 80년 드라이버즈 챔피언 존스는 로이트만과 함께 2년 연속 팀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81년 드라이버즈 우승컵은 윌리엄즈 듀오의 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브라밤의 유망주 넬슨 피케가 3승, 4PP, 50점을 기록하며 윌리엄즈의 막강 듀오를 따돌리고 드라이버즈 정상을 정복한 것이다. 시즌 초반 분위기는 윌리엄즈가 압도했다. 미국 롱비치 개막전을 원투승(존스 우승, 로이트만 2위)으로 장식한 윌리엄즈는 이어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도 표창대를 휩쓸었다(로이트만 우승, 존스 2위).
넬슨 피케의 반전은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되었다. 브라질에서의 폴포지션을 승리로 연결짓지 못한 피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53랩을 폴투피니시로 마무리하며 시즌 첫 승리를 기록했다. 이태리 이몰라 수중전 우승 트로피도 피케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81년 초반 4전에서 2승 포함 세 차례 포디엄에 올라간 피케는 윌리엄즈 듀오를 위협하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드라이버즈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로이트만과 질 빌르너브, 자크 라피테, 알랭 프로스트가 만만치 않은 추격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캐나다 그랑프리까지의 순위는 로이트만(49점), 피케(48점), 라피테(43점) 순. 로이트만이 시리즈 최종 15전 폴포지션을 잡아 피케의 역전은 한층 힘겨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의 대형 주차장에서 열린 미국 그랑프리 승자는 앨런 존스였고, 폴시터 로이트만은 8위로 굴렀다. 결국 5위를 기록한 넬슨 피케가 로이트만을 1점 차이로 따돌리고 첫 월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80년 중후반 F1은 맥라렌과 윌리엄즈의 양강 구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전설의 드라이버로 불리는 니키 라우다, 알랭 프로스트, 아일톤 세나가 펼친 명승부가 그랑프리 팬들의 시선을 잡아끈 시기였다.
90년대 들어서도 이어진 이들 팀의 접전에 베네통이 가세하면서 F1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 1점차 승패가 벌어진 1994년은 비극의 해였다. 데이먼 힐이 소속된 윌리엄즈가 3년 연속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88년, 90~91년 챔피언 아일톤 세나가 산마리노의 별로 사라졌고, 심테크의 롤란트 라첸베르거도 이몰라 그랑프리 예선에서 세상을 등졌다.
잊을 수 없는 슬픔이 몰아친 비극의 해에 탄생한 새로운 챔피언은 미하엘 슈마허(베네통)였다. 1991년, 조단을 통해 F1에 데뷔한 슈마허는 이적팀 베네통에서 눈에 띄는 성적(92년 3위, 93년 4위)을 보여주었고, 풀 시즌 3년째인 94년에는 마침내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개막전부터 내리 4연승을 기록한 슈마허는 유력한 챔피언 후보 세나가 사라진 무대에서 독주체제를 굳혀 나가기 시작했다.
시리즈 10전 헝가리 그랑프리까지 7승을 거둔 그의 유일한 라이벌은 데이먼 힐. 슈마허가 영국 실버스톤 GP 퍼레이드랩에서의 규정 위반으로 두 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사이 2승을 더한 데이먼은 이어진 포르투갈 GP에서도 승리하며 타이틀 도전의 불씨를 되살렸다. 남아 있는 그랑프리는 3전. 두 드라이버의 순위를 가른 점수 차이는 이제 1점으로 좁혀졌다.
유럽(슈마허)과 일본(힐)에서 한 차례 선두를 주고받은 힐과 슈마허의 시즌 마지막 대결은 호주 에들레이드에서 펼쳐졌다. 예선 기록은 나이젤 만셀, 슈마허, 힐, 미카 하키넨 순. 종반 3전 연속 혈전을 벌인 두 드라이버의 종말은 동반 리타이어로 끝났다. 레이스 중반, 트랙을 벗어난 슈마허가 방호벽을 긁는 사고에 휘말린 틈을 비집고 힐이 추월을 시도했지만, 경주차 충돌로 이어지면서 둘 다 트랙을 떠났다. 이로써 일본 그랑프리까지 1점 앞선 슈마허(92점)가 최종전에서 역전을 노린 힐(91점)을 제치고 94년 드라이버즈 왕좌를 차지했다.
2007~2008년에는 2년 연속 1점차 승부 벌어져
2000년대 초반 그랑프리는 미하엘 슈마허와 페라리의 독무대였다. 베네통에서 2연 연속 타이틀을 거머쥔 슈마허(94~95년)는 2000년부터 2004년 사이 페라리에서 라이벌이 없는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F1의 패권은 페르난도 알론소를 앞세운 르노(2005~2006)가 휘어잡았다.
그리고 맞이한 2007~2008년은 페라리와 맥라렌의 2파전. 공교롭게도 슈마허가 은퇴한 뒤 2년 동안 두 팀은 1점 차이로 드라이버즈 정상을 가르는 대접전을 펼쳤다. 2007년 라이벌은 키미 라이코넨(페라리)과 루이스 해밀턴(맥라렌). 맥라렌에서 이적한 키미는 시즌 개막전 호주 그랑프리 우승컵을 페라리에 바쳤고, 브라질에서의 최종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7위에 머문 루이스를 1점 차이로 제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이스는 드라마틱한 시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F1 데뷔 해에 아깝게 놓친 타이틀이 1년 뒤 같은 자리에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데뷔전 3위 포디엄, 9전 연속 시상대를 밟고 그랑프리 데뷔 6전 만에 우승컵을 차지한 과거를 잊고 2008년 호주 개막전에서 우승한 루이스는 2위 펠리페 마사(페라리)에 7점 앞선 채 최종전에 나섰다. 드라마의 배경은 1년 전과 같은 브라질 인터라고스. 상대 배우가 키미에서 마사로 바뀌었을 뿐, 1, 2위 사이에 놓인 점수는 7점 그대로였다.
레이스 흐름은 이번에도 루이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챔피언십 라이벌 펠리페 마사가 폴포지션을 잡아 홈그라운드 우승을 노리는 그에게 유리한 국면이었다. 게다가 최악의 수중전. 7랩이 남은 상황에서 강하게 쏟아진 빗줄기는 시즌 최종전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마지막 랩, 폴시터 마사가 여전히 선두를 달리는 동안 루이스의 자리는 6위. 5위 이내에 들어야 우승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달리는 티모 글록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마지막 반전 드라마가 루이스를 위해 펼쳐졌다. 펠리페 마사는 이미 피니시 체커기를 받고 폴투윈. 6위를 유지한다면 2007년과 같은 역전패가 재현되는 암울한 시점에서 그립을 잃고 휘청거리는 티모를 제친 루이스가 5위 체커기를 받았다. 루이스와 마사의 최종 점수는 98 대 97점. 브라질 우승에 기뻐하며 한 순간 챔피언의 단꿈을 만끽한 마사는 루이스의 5위 소식에 눈물을 떨구었다.
한편 F1 역사에 길이 남을 1점차 대결보다 더 치열한 시즌으로는 1984년을 꼽을 수 있다. 이 해 드라이버즈 챔피언을 가른 점수 차이는 단 0.5점. 시리즈 내내 라이벌 팀을 압도한 맥라렌 듀오 니키 라우다와 알랭 프로스트는 역사상 최소 0.5점 차이로 1, 2위를 가렸다. 시리즈 6전 모나코 수중전에서 패트릭 탕베이와 데릭 워익이 충돌사고를 낸데 이어 나이젤 만셀이 일으킨 사고의 여파로 레이스가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규정 점수의 절반만 부여해 0.5점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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