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10일(일), 전남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KIC)에서 대한모터사이클연맹 (KMF, Korea Motorcycle Federation)이 주최하는 ‘KMF 코리아 로드 레이스 챔피언십’ 2전이 개최된다.








핀란드 출신 하키넨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맥라렌에 합류한 키미 라이코넨은 일찍부터 F1 드라이버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랑프리 무대에서 ‘달리기 천재’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 수도 있지만 라이코넨의 성장과정은 유독 눈부셨다.
핀란드 에스포에서 태어난 키미는 10세 때부터 해외 카트 레이스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카트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드라이버 활동을 시작한 때는 1999년. 20세에 포뮬러 르노 시트에 앉아 F1 입성의 꿈을 키웠다. 첫 해 기록은 개막전 3위가 최고. 그러나 포뮬러 포드 유로컵 시리즈 5위, 마노 팀 소속으로 출전한 포뮬러 르노 윈터 시리즈에서는 4전 4승으로 챔피언에 올랐다. 포뮬러 클래스 데뷔 해 성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2000년에도 마노 소속으로 브리티시 르노 챔피언십에 출전한 키미는 10전 중 7승, 전 레이스 포디엄, 7회 폴포지션, 6회 패스티스트랩이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모터스포츠계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유럽 포뮬러 르노에 세 번 출전해 2승을 거두기도 했다.
2년 동안 참가한 23회 포뮬러 레이스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전에서 표창대 정상에 선 라이코넨의 드라이버 이력은 이후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그에게 자우버 팀 보스 피터 자우버가 F1 시트를 맡긴 것이다. F3와 F3000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F1에 발탁된 경우가 드문 때여서 라이코넨의 그랑프리 입성은 그 자체로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2007년 페라리에서 월드 챔피언 등극
2001년 봄. 22세의 라이코넨은 마침내 정식 F1 드라이버로서 신고식을 치렀다. 개막전 호주 그랑프리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수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능숙한 주행을 펼쳐 6위를 기록했다. 데뷔 해 개막전을 6위로 시작한 뒤 오스트리아와 캐나다 4위, 영국 GP 5위에 오르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라이코넨의 활약에 힘입어 자우버는 컨스트럭터즈 4위라는 창단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02 시즌 성적은 드라이버즈 9위. 뒤이어 라이코넨은 안식년을 보낸 뒤 레이스 활동 중단을 선언한 미카 하키넨의 바통을 이어받아 그랑프리 명문 맥라렌으로 자리를 옮겼다. 23세, F1 데뷔 1년 만에 거머쥔 행운이었다.
맥라렌에서도 잘 뛰었다. 테스트 주행 때부터 경험이 풍부한 데이빗 쿨사드에 전혀 밀리지 않는 빠른 달리기를 보였고, 프랑스에서는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기도 했다. 선두에 서서 그대로 달리기만 하면 표창대 정상에 설 수 있었지만, 노면에 뿌려진 오일에 미끄러지면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10개 GP에서의 리타이어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6위의 무난한 성적으로 맥라렌에서의 첫 시즌을 마쳤다.
2003년 마침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다가왔다. 말레이시아 그랑프리를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우승 정도가 아니라 시즌 마지막까지 슈마허와 챔피언 자리를 다투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슈마허에게 영광이 돌아갔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7, 2, 5위. 다소 주춤거린 3년을 보낸 키미는 2007년 슈마허가 떠난 페라리의 남은 자리로 옮기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페라리에서의 첫 해는 밝게 빛났다. 붉은색 오버롤을 입고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한 뒤 시즌 총 6승을 기록하면서 F1 데뷔 7년 만에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다. 맥라렌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루이스 해밀턴과의 점수 차이는 겨우 1점. 브라질 인터라고스 표창대에서 아이스맨은 모처럼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후 맥라렌과 브라운GP에 밀려 주춤거린 키미는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로 잠시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 뒤에 가려진 강인한 승부 근성으로 무장한 키미는 올해 다시 그랑프리 팬들 앞으로 돌아왔다.
자우버, 맥라렌, 페라리에 이어 키미 라이코넨을 불러들인 팀은 로터스. 2년 계약 첫 시즌 출발은 예상보다 좋은 편이다. 2012 F1 6전 모나코 그랑프리까지의 성적은 드라이버즈 6위. 중국 상하이 서킷을 제외한 모든 그랑프리에서 포인트를 따내며 예상보다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캐나다 GP를 앞둔 시점에서 시즌 초보다 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낸 키미가 포디엄 정상에 설 수 있을까? 현재까지 드러난 전력으로 볼 때 로터스와 키미에게 흐르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키미 라이코넨
국적 핀란드
생년월일 1979년 10월 17일
F1 데뷔 2001년 호주 그랑프리
그랑프리 출전 163GP
챔피언십 포인트 630점
우승 18승
폴포지션 16회
포디엄 64회
드라이버즈 챔피언 2007
※ 2012 F1 모나코 GP까지
박기현 기자 gokh3@naver.com
케케 로스베르크에 이어 그랑프리 정상에 오른 핀란드 출신 드라이버는 미카 하키넨이다. 98~99년 F1 월드 챔피언, 미카 하키넨은 1968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났다. 조용한 성격의 그가 레이스에 데뷔한 것은 6세 때인 1974년. 여느 드라이버와 마찬가지로 카트를 통해 스피드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13년 동안 카트를 타면서 거둔 성적은 핀란드 챔피언십 5회 우승. 카트에서 기본기를 충실히 닦은 하키넨은 이듬해 포뮬러 포드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고국 핀란드와 스위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레이스에서 우승컵을 따내며 유럽 시리즈 7위를 기록했다.
이듬해 GM 로터스 시리즈에 진출한 미카는 89년부터 F3로 영역을 넓혔다. 데뷔 첫해 성적은 영국 F3 시리즈 7위.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90년 영국 F3를 평정하는데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다. 영국 남동부 주에 자리 잡은 웨스트 서리 팀 소속으로 90년을 맞은 하키넨은 시즌 9승을 거두며 F3 정상을 밟았다. 이밖에 마카오, 이태리, 독일 등 F3 최고 무대에서 우승컵을 낚아 F1행 직행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1991년, 포뮬러 드라이버들의 꿈인 F1 시트를 차지한 것이다.
미하엘 슈마허 제압한 ‘플라잉 핀’
하키넨의 F1 고향은 로터스였다. 그러나 미국 그랑프리를 통해 F1에 데뷔한 그는 16전 동안 겨우 2점을 얻는데 그쳤다. 92년에도 눈에 띄는 기록을 뽑지 못한 하키넨은 11포인트, 드라이버즈 8위로 F1에서의 2년을 보냈다.
93년 맥라렌 팀 테스트 드라이버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안드레티를 대신해 맥라렌 포드 머신의 핸들을 잡았다. 당시 맥라렌의 에이스 드라이버는 서킷의 천재 아일톤 세나. 맥라렌 유니폼을 입고 뛴 첫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세나에 앞서 예선 3위를 기록했다. 결승에서는 32랩째 일어난 충돌사고로 아깝게 리타이어했지만, 인상 깊은 주행을 펼쳐 파란을 일으켰다.
라이벌 미하엘 슈마허와의 격돌은 이 게임에서 처음 이뤄졌다. 베네통의 새별 슈마허는 93년 F1 14전을 우승으로 장식하며 하키넨과의 첫 대결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하키넨의 공격도 만만치 않아 이어진 일본 그랑프리에서 F1 데뷔 후 첫 표창대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성적은 당시 F1의 정상 세나와 프로스트에 이은 3위.
94년 마크 불룬델과 한 조를 이룬 하키넨은 맥라렌-푸조 머신으로 15GP에 출전해 시리즈 4위를 기록했다. 이해 드라이버즈 챔피언인 미하엘 슈마허에 한참 뒤졌지만 6차례 표창대를 밟아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탄탄대로에 접어든 하키넨에게 95년은 시련기였다. 시즌 마지막 호주 그랑프리 예선에서 시속 240km의 속도로 타이어 장벽을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연석을 타고 튀어 오른 하키넨의 머신은 빙그르르 돌면서 15m를 날아갔고, 충격의 여파는 하키넨의 숨통을 조였다. 싸늘해진 관중석은 한순간 94년 세나의 목숨을 앗아간 이몰라 서킷을 연상시켰지만, 구급대의 기민한 응급조치로 더 이상의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고로 하키넨은 머리를 심하게 다쳤으나, 다행히 빠르게 회복되었다.
96년 개막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는 96, 97년 5위와 6위를 거두며 상위권에 머물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맥라렌에서의 2년을 마칠 무렵, 하키넨은 꿈에 그리던 표창대 정상을 밟았다. 97년 F1 최종전 유럽 그랑프리에서 동료 쿨사드와 함께 원투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승리는 앞서 달리던 슈마허와 빌르너브의 충돌로 인해 굴러 들어온 것이었지만 하키넨에게는 잊지 못할 우승이었다.
드디어 98년, 시리즈 16전 중 8GP에서 우승한 미카 하키넨은 세계 모터스포츠 정상을 정복했다. F1에 첫발을 디딘 이후 8년, 그랑프리 출전 112전만의 쾌거였다. 하키넨의 시리즈 우승은 98년 11월 1일 일본 스즈카에서의 극적인 우승으로 더욱 빛났다. 시즌 막판까지 미하엘 슈마허와 접전을 벌인 그는 최종전 피니시라인을 제일 먼저 밟아 라이벌의 콧대를 눌렀다. 결국 챔피언십 포인트 100점을 따낸 하키넨은 뒤따르던 슈마허(86점)를 여유 있게 누르고 감격스러운 드라이버즈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드라이버즈 챔피언은 핀란드인으로는 두 번째. 스승이었던 케케 로즈베르크에 이어 16년 만에 F1을 평정해 ‘핀란드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99년 F1 16전을 다시 한 번 제압한 하키넨은 2년 연속 그랑프리 우승을 일군 7명(이후 미하엘 슈마허와 페르난도 알론소, 세바스찬 베텔도 연패를 기록했다)의 드라이버에 이름을 올렸다. 시즌 5승에 챔피언십 포인트는 76점. 98년에 비해 떨어지는 성적이었지만 극적인 우승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라이벌 슈마허가 사고로 6경기를 쉬는 사이 페라리의 에디 어바인과 손에 땀을 쥐는 전투 끝에 얻은 월드 챔피언이었기 때문이다.
99년 우승 역시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 판가름났다. 반드시 우승해야 드라이버즈 챔피언 2연패를 거둘 수 있는 절박한 상황. 슈마허에 밀려 예선 2위를 기록한 하키넨은 출발과 동시에 번개작전을 펼쳐 선두에 나섰다. 이후 53랩 내내 스즈카 서킷을 휘어잡은 그는 슈마허를 5초 차이로 따돌리고 1위로 피니시라인을 갈라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을 열광시켰다. ‘페라리가 유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은 하키넨은 16전 중 11회 폴포지션을 따내는 대기록과 함께 F1 2연패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미카 하키넨의 2000년은 밝지 않았다. 시즌 4승, 종합 2위의 성적만 놓고 보면 나무랄 데 없었지만 슈마허의 거센 공격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슈마허가 일찌감치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확정지은 것과 달리 시리즈 5위로 한 걸음 물러났고, 이후 2002년 잠정 은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트랙을 떠났다. 맥라렌을 떠나면서 고국 핀란드의 기대주 키미 라이코넨을 추천한 하키넨은 플라잉 핀(Flying Finn)의 명성을 팬들의 가슴에 남긴 채 F1 커리어를 접었다.
미카 하키넨
국적 핀란드
생년월일 1968년 9월 28일
F1 데뷔 1991년 미국 그랑프리
그랑프리 출전 165GP
챔피언십 포인트 420점
우승 20승
폴포지션 26PP
포디엄 51회
드라이버즈 챔피언 1998, 1999
박기현 gokh3@naver.com ㅣ 사진 LAT Photographic
북유럽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핀란드는 세 명의 F1 챔피언을 보유하고 있다. 케케 로스베르크, 미카 하키넨, 키미 라이코넨이 그 주인공.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F1 드라이버(7명)를 배출했지만, 핀란드 출신 케케와 미카, 그리고 키미는 세계 곳곳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명 드라이버로 꼽을 만하다.
당대의 거장 디디에 피로니와 알랭 프로스트를 제치고 82년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차지한 케케, 미하엘 슈마허의 추격을 제압하고 98~99년 연속 챔피언에 오른 미카, 2007년 루키 돌풍의 주역 루이스 해밀턴을 1점 차이로 따돌린 키미……. 이들 셋은 F1에서 자국 핀란드의 이름을 드높인 삼인방으로 손색이 없다. 뚜렷한 개성과 눈에 띄는 실력을 갖춘 세 드라이버 중 먼저 케케 로스베르크의 커리어를 따라가 보자.
핀란드 출신 첫 F1 드라이버즈 챔피언
케케 로스베르크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포뮬러 드라이버의 길을 선택한 그에게 숱한 난관이 밀려들었지만, 세계 정상을 향한 의지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좌절과 성공, 그리고 또 다른 내리막 앞에서 당당했던 케케……. 82년 F1 챔피언 케케 로스베르크의 열정은 지금도 핀란드 출신 드라이버들의 가슴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키누엔과 코자로비츠키에 이어 핀란드인으로는 세 번째로 F1 드라이버가 된 케케는 1948년 12월 6일 핀란드 수도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카트와 엔트리 포뮬러를 거친 그는 1977년 F2에서 핀란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어 이듬해 영국 실버스톤 인터내셔널 트로피에서 우승하며 F1 관계자들에게 주목받은 케케는 신생 시어도어 팀에 들어가는 행운을 안았다.
F1 데뷔전은 1978년 3월 4일, 키얄라미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그랑프리. 성적은 신통치 않아 24그리드에서 출발해 15랩을 달린 뒤 리타이어했다. 이후 연이어 경주차 트러블에 시달린 그는 시어도어를 떠나 ATS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이적 팀에서도 뚜렷한 전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 차례 그랑프리 중 2전을 완주했지만,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을 맴돌 뿐이었다.
78년 최고 기록은 울프 팀에서의 10위. 2년 동안 시어도어, ATS, 울프 등을 전전한 케케는 80년 피티팔디 팀에 들어가면서 드라이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개막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3위로 첫 포디엄을 밟은 것이다. 그러나 한 순간 상승세로는 다가오는 먹구름을 피할 수 없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머신으로 고전하던 케케는 81년 그랑프리를 마치지 못하고 팀을 떠날 수밖에 없는 비운에 빠졌다.
3년 동안 중하위 팀에 머문 케케에게 프랭크 윌리엄즈는 구원의 신이었다. 윌리엄즈 세컨드 드라이버로 카를로스 로이테만과 짝을 이룬 그는 넘버 원 드라이버가 떠나자 곧 팀의 리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포드 코스워스 엔진을 얹은 윌리엄즈 FW08을 타고 출전한 82년은 챔피언 타이틀을 향한 꿈을 키워나간 해였다. 그의 라이벌은 선두에서 차근차근 점수를 모아가던 페라리의 디디에 피로니. 시즌 4경기만을 남겨둔 독일 그랑프리까지 단 한 번의 우승도 거두지 못했고, 선두와의 점수 차이는 12점으로 벌어져 그의 꿈은 흐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선두 피로니가 호켄하임에서의 사고로 더 이상 시리즈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행운의 여신은 케케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후 스위스에서 생애 첫 F1 우승을 차지한 그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최종전에서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확정지었다. 81년에 단 1점도 획득하지 못한 드라이버가 불과 1승으로 챔피언에 오르게 된 셈이다. 핀란드 출신 최초의 F1 월드 챔피언이다.
자연흡기 시대가 막을 내리고 터보 시대로 돌입한 F1 타이틀 쟁탈전은 혼돈의 시기였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엔진으로 83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개인 통산 2승을 기록했지만 시리즈 성적은 5위에 그쳤다. 1984년 윌리엄즈가 혼다 터보 엔진을 도입하면서 기대를 걸었지만, 역시 머신 트러블로 고단한 1년을 보냈다. 2승을 기반으로 1985년 시리즈를 3위로 마친 케케에게 더 이상 찬란한 시기는 다가오지 않았다. 맥라렌으로 옮긴 86년 모나코에서 2위 표창대에 선 것을 제외하면 연이어 터진 머신 트러블로 고전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 남은 선택은 은퇴. 호주 최종전에서 팀 동료 알랭 프로스트가 우승할 수 있도록 지원한 케케는 레이스 종료 20랩을 남기고 리타이어했다.
은퇴한 케케 로스베르크는 1992부터 95년까지 독일투어링카챔피언십에서 활동하며 핀란드의 젊은 드라이버 육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뒤를 이어 핀란드 출신 F1 챔피언이 된 미카 하키넨이 대표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니코 로스베르크는 현재 메르세데스 팀에서 F1 드라이버로 활동하고 있다. 좁은 길을 선택해 조국 핀란드에 첫 F1 타이틀을 바친 케케 로스베르크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과감히 F1 트랙을 내려왔지만, 그의 열정은 핀란드의 후예들을 통해 여전히 F1 서킷을 달리고 있다.
케케 로스베르크
국적 핀란드
생년월일 1948년 12월 6일
F1 데뷔 1978년 남아프리카 그랑프리
그랑프리 출전 114GP
챔피언십 포인트 159.5점
우승 5승
폴포지션 5PP
포디엄 17회
드라이버즈 챔피언 1982년
박기현 gokh3@naver.com ㅣ 사진 LAT Photograp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