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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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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 모터스포츠 대중화 위해 매진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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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동차경주협회(KARA)가 주관한 ‘2011 모터스포츠인의 밤’ 행사가 12월 20일(화) 서울 서초구 양재동 L타워 그랜드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KARA는 향후 4년 동안 추진할 비전을 발표하고, 모터스포츠인들의 화합을 강조했다.
“2015년, 150만 관중 시대 열기 위해 노력하겠다”
KARA 7대 회장으로 선임된 변동식 회장은 인사말을 전한 뒤 “하나의 산업을 성공적으로 일구기는 지루하고 어려운 일”이라면서 “국내 모터스포츠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2015년까지 주어진 임기 내에 모터스포츠가 크게 도약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변동식 회장은 2012년을 모터스포츠 대중화 원년으로 삼고, 2015년에는 아시아 모터스포츠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KARA가 제시한 비전은 크게 모터스포츠 인프라 확충, 이용 저변 확대, 전문 역량 강화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제도와 정책 정비, 스폰서십 확대, 전문 인력과 기반설비 확충을 발판 삼아 대중성과 연관산업 협력 유도, 일반 관중 참여 프로그램 활성화 등을 추진할 방침이라는 것. 여기에는 2013년 모터스포츠 산업 활성화, 2014년 100만 관중시대(KARA 회원 5만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KARA는 중점 과제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스포츠 관련 정부기금 유치 강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드라이버 및 오피셜 등용 프로그램 강화, 대도시 인근의 서킷과 중소형 다목적(드래그 및 짐카나) 경주장 확충 등이다.
KARA는 모터스포츠 대중화를 추진할 세부 계획도 발표했다. 대중적인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국제자동차연맹(FIA)과 연계해 공익활동(Road Safety)을 펼치고, 자동차회사와 협회, 레이싱팀이 주축이 된 안전운전 프로그램도 운영할 방침이다.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짐카나와 카트를 활성화시켜 모터스포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내구 레이스와 같은 모터스포츠 페스티벌 등으로 다각적인 틀에서 발전을 도모할 계획이다.
전문적인 역량을 키우는데도 힘을 쏟아 FIA 세계 모터스포츠평의회(WMSC) 및 주요 위원회 가입을 추진하고, 아시아 주요국과 정기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방안도 진행할 예정이다. KARA 내부적으로는 각 위원회의 권한과 책임 범위를 넓혀 다양성을 확보할 방침이다. 이밖에 국내 드라이버의 해외 진출을 위한 스칼라십을 운영하고, 역량을 갖춘 오피셜과 미캐닉의 해외 진출도 추진한다.
그러나 2015년까지 국내 모터스포츠 시장 규모를 5천억원 이상으로 키우고, 150만 관중을 유도하겠다는 KARA의 4년 청사진을 계획대로 추진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물론, 우리나라 모터스포츠의 중심에 서 있는 KARA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비전’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세부적인 목표부터 차근차근 풀어 나아가는 일이 더 급선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명쾌하고 발전적인 목표를 원만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KARA 내부로부터의 개선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다분히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현재까지의 모습으로는 레이싱팀과 드라이버, 각 프로모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어렵다. 이름뿐인 KARA의 여러 위원회를 개선하는 일도 시급하다. 랠리, 카트, 4×4, 튜닝, 짐카나, 오피셜 위원회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KARA 모터스포츠 위원회의 최근 활동을 되돌아보면 향후 행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위원회 임원, 임기, 활동 등을 투명하게 공지해 회원들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대체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리고 있는 레이싱팀과 드라이버들의 참여를 더욱 독려하려면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등록비와 같은 문제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KARA가 이 시점에서 재고해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이다. 비영리 단체인 KARA의 내부 살림을 헤치는 수준이 되어서도 곤란한 일이지만, 많은 팀들이 내놓을 만한 타이틀 스폰서 없이 1년 농사를 짓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문제는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고 국내 카트계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 변변한 서킷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부단히 애쓰고 있는 카트계 오거나이저와 팀, 드라이버들에게 프로모터 또는 프로 레이싱팀과 같은 잣대를 요구하는 것은 발전을 전제로 한 선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일과 거리가 멀다.
카트는 차세대 우리나라 모터스포츠를 이끌어갈 드라이버를 양성하는 인큐베이터와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자동차경주에 실력을 갖춘 드라이버들의 유입이 크게 줄어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넓지 않은 카트 레이스 저변에서 찾을 수 있다.
카트 레이스 활성화를 전시행정적인 인상이 짙은 ‘2011 코리아 카트 페스티벌’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계속된 이 행사가 KARA의 당초 목표인 ‘카트 저변확대와 꿈나무 육성’에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회성 이벤트에 모터스포츠 문외한인 사람들의 마음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깊이 고민했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레이스 프로모터들의 숙원인 관중 증대를 KARA가 어떤 해법을 갖고 풀어 나갈지도 궁금하다. 여기에 더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하는 드라이버 스칼라십 운영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KARA 7대 회장으로 선임된 지 103일째 되는 날 ‘2011 모터스포츠인의 밤’을 주재한 변동식 회장은 시종 차분하고 자신 있게 발전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이 자체로도 일단 첫 단추는 잘 꿰었다고 평가된다. 대한민국 모터스포츠의 핵심 단체 KARA가 프로모터와 레이싱팀, 드라이버, 그리고 수많은 레이스 팬들에게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편, KARA는 모터스포츠인의 밤 행사에서 F1 코리아 그랑프리 조직위원회와 (주)슈퍼레이스,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 MBC에 공로상을 수여했다.
박기현(allen@trackside.co.kr), 사진/K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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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이 고바야시 헬멧, 1만9천달러에 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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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버 F1이 소속팀 드라이버 카무이 고바야시와 6인조 하드록 그룹 린킨파크가 공동으로 진행한 자선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밝혔다.
자우버 팀에 따르면 고바야시가 이번 자선행사에 내놓은 헬멧은 지난해 F1 최종전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온라인 옥션을 통해 1만9천달러(약 2천200만원)에 팔렸다. 수익금은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자선단체 뮤직 포 릴리프(Music for Relief)를 통해 일본 구호단체에 전달될 예정이다.
이번 자선행사는 지난해 싱가포르 그랑프리 때부터 계획되었다는 소식이다. 헬멧 디자인에는 린킨파크 멤버 겸 프로듀서 조셉 한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Music for Relief’는 그동안 500만달러(약 57억5천만원) 이상을 모금했다. 이 가운데 70만달러(약 8억원)는 지난해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에게 이미 전달되었다. 자선행사를 통해 거둔 수익은 자연재해로부터 희생된 이들을 위해 사용된다.
세르지오 페레즈와 함께 올해도 자우버 시트를 차지한 카무이 고바야시는 현재 유일한 일본인 F1 드라이버로, 현재까지 기록한 드라이버즈 포인트는 65점. 2009년 토요타 팀에서 F1에 데뷔(브라질 그랑프리)한 뒤 3년 동안 40GP에 출전했다.
TRACKSIDE NEWS, 사진/자우버 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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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 카그래피 이명재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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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에서는 언제나 선한 이미지가 풍긴다. 사람 좋은 웃음이 몸에 밴 듯…, 늘 부드러운 얼굴로 세상과 마주하는 그에게서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손에 카메라가 들리면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웃음기 빠진 눈빛에 스민 ‘진중함’이 카메라 렌즈에 투영되는 찰나와 마주하는 순간이기에….
MJ 카그래피 이명재 실장. 모터사이클과 자동차 전문잡지 사진기자를 거쳐 지금은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현장을 주로 촬영하는 사진가로 변신한 그는 요즘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다른 열정과 실력을 인정받아 수입차 업계는 물론 여러 잡지 시승기에 들어갈 사진 촬영이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방배동에 마련된 MJ 카그래피 사무실을 찾아간 때는 지난해 연말 겨울바람이 차고 매서운 날 밤 10시.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훅 달려드는 온기가 반갑다. 손수 끓인 차를 내오며 “밀린 일이 많아 오늘도 철야를 해야 한다”는 이명재 실장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맡은 일에 임해서일까?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차향처럼 은은하게 번지는 듯했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한밤중으로 이어진 사진가 이명재와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사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을 겸손으로 가렸지만, 인터뷰 내내 전해지는 그의 진정성에는 오래도록 반추해도 좋을 ‘그 무엇들’이 켜켜이 담긴 덕분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진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MJ 카그래피 이명재. 잠시 들여다 본 그의 사진 세계에는 우직하면서 매력적인 단면들이 촘촘하게 엮여있었다.
Q)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여러 분야 중에서 자동차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촌형의 영향이 컸습니다. 모터크로스(산악용 모터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던 사촌형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어요. 유년 시절(1970년대)의 나에게 모터사이클과 수입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던 당시 사촌형은 우상에 가까웠다고나 할까요?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 자주 접한 모터사이클과 여러 자동차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두 차례 F1 그랑프리에서 오피셜 포토그래퍼로 활동했지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어려웠던 일을 꼽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라이버들을 직접 촬영한다는 것은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F1 코리아 그랑프리 조직위원회의 전체적인 운영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어 사진기자들이 이용하는 셔틀버스가 제때 운행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어요. 외신기자들과 함께 무거운 장비를 들고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요. 내년에는 달라지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웃음).
Q) 국내 모터스포츠 현장에서도 오랫동안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의 순간을 꼽으라면 언제일까요?
A) 무엇보다 1995년에 공식적으로 문을 연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 서킷의 태동을 꼽고 싶습니다. 그 이전에는 레이스 전용 서킷이 없어 영종도나 청포대 등지를 오가며 비포장 레이스를 펼쳤었는데요, 스피드웨이가 문을 열면서 국내 모터스포츠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경남 창원에서 열린 F3 코리아 수퍼프리도 기억에 남는 이슈였습니다. 1999년부터 5년 동안 치러진 F3 코리아 수퍼프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해외 자동차경주로, 국내 레이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입니다. 폭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던 당시 국내 모터스포츠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기자 입장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2010년에 처음 열린 F1 코리아 그랑프리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의 순간이지요. 모터스포츠 변방국에서 순식간에 세계 최고로 꼽히는 F1 그랑프리를 개최한 국가 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어느 모로 보나 F1 코리아 그랑프리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모터스포츠계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어요.
Q) 모터스포츠 외에도 자동차 사진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 사진과 모터스포츠 사진 사이에 차이점 있다면?
A) 음…. 가장 큰 차이점은 수익입니다(웃음). 자동차 사진을 통해 대부분의 수익을 얻고 있으니까요(웃음).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사진의 공통 주제는 ‘자동차’를 찍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자동차 사진은 상업적인 사진으로서 자동차가 가장 돋보여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장소 섭외부터 촬영 전반에 이르기까지 직접 모든 작업을 기획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모터스포츠 사진은 레이스의 긴장감, 배기음, 선수들과 미캐닉들의 열정, 관중들의 응원 등이 한데 어우러진 하나의 다큐멘터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구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모터스포츠 사진은 ‘휴머니즘과 메커니즘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Q) 평소 촬영할 때 주로 사용하는 카메라는 어떤 것인가요?
A) 캐논 제품을 주로 사용합니다. 아무래도 사진은 결과물이 좋아야 하니까요. 니콘보다는 캐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자동차 사진을 찍을 때는 5D 마크2(5D MARK2)와 28~105mm 렌즈를 애용하고, 모터스포츠 현장에서는 1D 마크3(1D MARK3), 70~200mm/300mm 렌즈와 1.4 컨버터를 사용합니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큰 직종이지요(웃음).
Q) 자동차든 모터스포츠 사진이든 사무실 밖에서의 작업이 많겠군요. 출장이 잦다보면 집에서 좋아하지 않을 듯한데요…….
A) 그런 면에서 아내에게 늘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잡지사에서 사진기자와 디자이너로 만나 2년 동안 연애한 뒤 결혼했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아내는 늘 제 사진을 좋아합니다. 사진에 대한 저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해주는 아내의 배려에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늘 고맙고, 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Q) 지금까지 사진을 찍으면서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을 텐데요. 재미있는 경험도 많았을테고, 또 위험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A) 사실 사고가 제일 무섭지요. 4년 전, 후배가 장난으로 차를 가지고 묘기를 부리다 제 앞에서 전복된 일이 있었는데요, 정말 놀랐습니다. 사고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좋은 앵글을 만들기 위해 차 밖으로 몸을 빼고 사진을 찍다가 위험한 순간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촬영에 열중하느라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는데요. 나중에 가로수와 전신주에 부딪칠 뻔 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카락이 꼿꼿하게 설 정도였으니까요.
Q)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면서 힘겨운 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때 힘이 되는 멘토,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A)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 사진가 타지마 하루를 개인적인 멘토로 삼고 있습니다. 제가 자동차 사진을 시작할 무렵 일본에서 그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열정을 다해 일하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늘 머릿속에 새기고 있는 좌우명은 ‘일할 때 즐겨라’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즐겨야지요(웃음).
Q)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포토그래퍼는?
A) 자동차 사진을 주로 찍어서인지 차 사진에 더 애착이 갑니다. 특히 ‘대런 히스(DARREN HEATH)’라는 F1 사진가는 제게 깊은 감명을 준 인물인데요. 모터스포츠 사진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끌어올린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앞으로 모터스포츠 사진에는 도전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사진으로 담고 싶은 것이 있다면?
A) 지금보다는 더 폭넓은 영역을 다루고 싶습니다. 그동안에는 자동차를 고집했지만, 좀 더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여느 스포츠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Q) ‘포토그래퍼 이명재’가 생각하는 사진 세계는?
A) 한 마디로 ‘제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사진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또 생활의 방편이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인 모든 생활 패턴이 사진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로 인해 아내와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점에 대해서는 늘 미안할 뿐입니다.
* <뉴스웨이>에 실린 윤경현 기자의 글과 사진을 옮겨왔습니다(편집자 주)

패트릭 헤드, 윌리엄즈 엔지니어링 디렉터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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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즈 F1이 패트릭 헤드가 더 이상 팀 엔지니어링 디렉터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지난해 12월 31일, 윌리엄즈 그랑프리 홀딩스 PLC(WGF1)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패트릭은 팀 엔지니어링 디렉터 자리를 떠나 윌리엄즈 파워(Williams Power Limited.) 디렉터로 옮긴다. 이에 따라 앞으로 패트릭은 F1 머신 셋업에는 더 이상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윌리엄즈 대표 프랭크 윌리엄즈 경은 이와 관련해 “패트릭과 파트너십을 맺은 지 34년이 지났다. 헤드와 함께 그동안 수많은 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윌리엄즈가 챔피언십을 차지하는데도 크게 기여한 패트릭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며, 잊을 수 없는 귀중한 보물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프랭크는 이어 “패트릭은 매우 솔직한 인물이었다. 진정으로 열심히 일했고, 엔지니어들이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의 오랜 동료로서 그로브에 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윌리엄즈 F1을 떠나는 패트릭 헤드(65)는 “더 이상 팀에 머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면서 “앞으로 마이크 코플란과 마크 질란 등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겠다”고 밝혔다.
패트릭 헤드는 지난 1977년부터 윌리엄즈에서 활동했다. 그가 머문 34년 동안 윌리엄즈는 113승, 9회 컨스트럭터즈 챔피언, 7회 드라이버즈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윌리엄즈가 가장 최근에 기록한 우승은 후앙 파블로 몬토야의 2004년 최종전 브라질 그랑프리. 데이먼 힐과 자크 빌르너브가 활약한 96~97년 연속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제패한 이후에는 페라리, 맥라렌, 르노에 밀리면서 그랑프리 명가의 자존심을 구겼다. 지난해 컨스트럭터즈 순위는 9위. 모나코와 캐나다, 그리고 헝가리에서 겨우 5점을 얻었을 뿐이다.
박기현(allen@trackside.co.kr), 사진/윌리엄즈 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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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최다 연승 1위 드라이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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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최다 연승 부문 정상은 알베르토 아스카리가 쌓은 9연승이다. 아스카리는 페라리 드라이버로 월드 챔피언에 오른 1952~53년에 최다 연승 기록을 작성했다. 두 시즌에 걸쳐 세운 그의 연승 행진은 2위(미하엘 슈마허의 6승)와 큰 차이가 있어 당분간 허물어지지 않을 장벽으로 남을 듯하다.
1918년 이태리에서 태어난 아스카리는 ‘신비한 드라이버‘로 불렸다. 그의 승리에는 항상 우연과 행운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아스카리의 아버지 안토니오도 이름난 드라이버였다. 안토니오는 아스카리가 7살 때 프랑스 파리 근교 레이스 트랙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을 결심을 하고 몇 년 후 모터사이클 경주에 뛰어들었다.
1940년부터 카레이스에 출전한 그는 47년 그랑프리에 페라리 팀 드라이버로 데뷔했다. 현대적인 F1이 출범한 1950년 아스카리는 시즌 5위에 오르며 페라리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혔고, 51년에는 2승을 거두며 그 해 월드 챔피언 후앙 마누엘 판지오에 이어 드라이버즈 부분 2위를 차지했다.
F1 엔진 규정이 1.5ℓ에서 2.0ℓ로 바뀐 52년 F1은 페라리의 독무대였다. 시즌 개막전에서 피에로 타루피(페라리)가 승리했지만, 2전부터 여섯 경주 연속 아스카리가 우승해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따냈다. 이듬해에도 1~3전 표창대 정상을 밟아 F1 역사에 오래 남을 이정표를 세웠다. 월드 챔피언 2연패를 이룬 아스카리는 54~55년 마세라티와 란치아 팀에서 레이스를 펼쳤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아스카리가 운명을 달리한 날은 1955년 5월 26일. 아버지 안토니오가 세상을 등진 날, 36세의 나이로 서킷을 떠났다. 이태리 몬자에서 스포츠카 테스트 드라이브 도중 트랙 장벽을 들이받는 불의의 사고를 낸 것이다. 50~55년 그랑프리에서 활동한 알베르토 아스카리는 6년 동안 32경기에 출전해 13승, 14폴포지션, 챔피언십 포인트 139점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최다 연승 2위 드라이버는 미하엘 슈마허다. 그의 최다 연승 기록은 2004년의 7연승. 시리즈 18전 중 13전 우승컵을 독식한 것에 머물지 않고, 7전(유럽)부터 13전(헝가리)까지 7개 그랑프리를 연이어 석권하며 개인통산 일곱 번째 월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3위에 이름을 올린 드라이버 역시 미하엘 슈마허. 2000년 최종전 말레이시아 GP까지 4연승을 거둔 슈마허는 2001년 개막전부터 2연승을 더해 6GP 연속 우승컵을 낚았다. 4위 그룹에는 잭 브라밤(60년), 짐 클라크(65년), 나이젤 만셀(92년), 미하엘 슈마허 등이 함께 올라 있다. 이들은 각각 연승 기록을 작성한 해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호주 출신 드라이버 잭 브라밤은 55~70년까지 126회 F1에 출전해 3회 월드 챔피언(59, 60, 66년)에 올랐고, 영국 드라이버 짐 클라크는 2회(63, 65년)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80~95년까지 16년 동안 187전을 치른 나이젤 만셀은 윌리엄즈에서 활약한 92년 에 9승을 거둬 시즌 우승컵을 가져갔다.
최다 연승 순위
순위 연승 드라이버국적 기록 연도
1 9 알베르토 아스카리 이태리 1952~53
2 7 미하엘 슈마허 독일 2004
3 6 미하엘 슈마허 독일 200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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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F1 1, 2위 최소 시간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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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포뮬러원 챔피언십이 정식으로 출범한 이후 현재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세월이 흘러도 깨지지 않을 F1 최초의 월드 챔피언 기록 같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최단 시간 리타이어 같은 웃지 못 할 기록들도 있다.

단순히 패스티스트랩이나 서킷 랩 기록을 살펴보면 엔진과 에어로다이내믹 기술의 발달로 후대의 드라이버들이 과거의 영웅들을 뛰어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첨단 기술로도 넘어설 수 없는 기록들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오히려 기술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드라이버들의 역량에 따라 작성된 기록들이 더욱 빛나는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1950년부터 현재까지, F1의 영웅들이 쌓아올린 ‘기록의 전당’속으로 들어가 보자.

역대 최단 1~2위 시간차는 1972년 이태리 그랑프리에서의 0.01

2002년 미국 그랑프리에서는 미하엘 슈마허가 연출한 해프닝으로 좀처럼 보기 어려운 1/100초 승부가 펼쳐졌다. 9월 29일, 15만 관중이 모인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슈마허를 선두로 1, 2그리드를 차지한 페라리는 윌리엄즈의 두 머신이 서로 부딪히는 어이없는 사고로 일찌감치 라이벌을 따돌리고 73랩을 편안하게 달렸다.

선두로 달리던 슈마허는 마지막 코너에서 갑자기 바깥쪽으로 돌아나가고, 오스트리아에서의 양보(루벤스 바리첼로가 1위 자리를 팀 동료 미하엘 슈마허에게 선두를 양보했다)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리첼로를 안쪽 라인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마치 드래그레이스를 펼치듯 나란히 직선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결과는 0.011초 차이로 바리첼로 역전승이었다.

결과 발표 후 슈마허는 “바리첼로와 함께 결승선을 통과해 새로운 기록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이미 확정지은 여유 때문이었는지, 신기록을 갱신에 재미가 붙어서인지, 슈마허의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오랜만에 F1에서 찰나의 승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페라리의 쌍두마차는 피터 게딘과 로니 피터슨이 수립한 F1의 최소 시간차 1, 2위 기록을 깨는 데는 실패했다.

가장 짧은 시간 차이로 1, 2위가 갈린 레이스는 이태리 몬자에서 나왔다. 과거 몬자 서킷은 고속 코스로 명성이 높았고, 기록의 주인공 피터 게딘은 11그리드에 섰지만 폴시터 크리스 아몽과의 차이는 단 1초에 불과했다. 레이스가 시작되자 10여 대가 꼬리를 물며 선두그룹을 형성해 우승자를 미리 점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속 코스를 견디지 못하고 많은 드라이버들이 리타이어한 가운데 피터 게딘은 선두그룹으로 올라섰고,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둔 54랩에서는 피터슨에 이어 3위를 달렸다. 게딘은 피터슨이 갈 길을 가로막자 풀밭으로 뛰어들어 추월에 성공했다. 하지만 마지막 코너에서는 뒤늦은 브레이킹으로 타이어에서 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고, 어렵게 균형을 잡은 그와 함께 5명이 무리를 지어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과적으로 우승을 거머쥔 드라이버는 게딘이었다. 2위 피터슨과는 겨우 0.01초 차이. 1~5위까지 0.61초안에 모두 결승선을 통과하는 F1 사상 초유의 레이스였다.

1986년 새로 만들어진 스페인 헤레즈에서 나이젤 만셀은 마지막 9랩을 남기고 타이어 교환으로 도박을 걸었지만 만셀의 역전극은 아쉽게 실패하고 0.014초 차이로 아일톤 세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주가 1, 2위간 시간차에서 3번째 자리에 올라 있다.

F1 통산 0.1초 이하의 승부는 모두 7차례. 반면 촌음은커녕 선두와 한 바퀴 이상 차이를 보이는 다소 싱거운 승부들도 있었다. 1969년 스페인 몬주익 파크에서 재키 스튜어트는 선두권 드라이버들의 잇따른 리타이어로 2위 브루스 맥라렌을 무려 2바퀴 차이로 따돌리고 결승선을 밟았다.

또한 1995년 호주 애들레이드에서는 계속되는 사고로 28명 중 예선 2~11위를 포함한 16명이 리타이어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졌다. 폴포지션에서 출발한 데이먼 힐은 경쟁자들이 사라지자 독주를 펼치며 올리비에 파니스보다 2바퀴 앞서 골인했다. 이밖에도 역대 F1 경기 중 1, 2위가 1바퀴 차이로 벌어진 경우는 무려 25번에 이른다.

F1 1~2위 최소 시간차 순위

1 피터 게딘 vs 로니 피터슨, 0.010, 이태리 몬자(1971)

2 루벤스 바리첼로 vs 미하엘 슈마허, 0.011, 미국 인디애나폴리스(2002)

3 아일톤 세나 vs 나이젤 만셀, 0.014, 스페인 헤레즈(1986)

4 엘리오 안젤리스 vs 케케 로스베르크, 0.050, 오스트리아 A1링(1982)

5 재키 스튜어트 vs 요헨 린트, 0.080, 이태리 몬자(1969)

박기현 기자 gokh3@naver.com

기아 K5 레이싱카, 2012 북미 국제 오토쇼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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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가 1월 9~22일까지 미국 디트로이트 코보센터에서 열리는 북미 국제 오토쇼에 K5 하이브리드(현지명 옵티마 하이브리드)와 K5 레이싱카 등 총 19대의 자동차를 전시한다.
K5 하이브리드는 기아가 세계 최초로 독자 개발한 병렬형 하드 타입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해 세계 정상급 친환경 기술력과 성능을 확보한 신개념 휘발유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K5 하이브리드에는 최고출력 168마력(ps), 최대토크 21.3kg·m를 내는 하이브리드 전용 세타Ⅱ 2.4 엔진과 30kW급 전기모터, 하이브리드 전용 6단 자동변속기를 탑재되어 있다. 연비는 고속도로 기준 약 17.0km/L. 시내에서는 리터 당 약 14.9km를 주행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기아는 2012 피렐리 월드 챌린지 챔피언십에 출전할 K5 레이싱카를 공개해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K5 경주차는 이번 대회에서 머스탱, 카마로 등과 경쟁하게 된다. 이밖에 기아는 K5, 프라이드(현지명 리오) 등 주요 차종을 경주차로 개조해 올해 미국 내 주요 자동차경주에 참가할 방침이다. 미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모터스포츠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한편, 기아는 2009년 출시된 이후 판매 10만대를 돌파한 쏘울(10만2천267대), 쏘렌토(13만235대) 등 주요 차종의 약진에 힘입어 지난 한 해 동안 전년대비 36.3% 성장한 48만5천492대를 판매해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고 밝혔다.
TRACKSIDE NEWS, 사진/기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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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점수 제도 어떻게 변해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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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그랑프리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순위를 가름하는 점수 제도는 1950년 이후 여러 차례 바뀌었다. 현행 포인트 규정은 1위부터 10위까지 25~1점을 차등 부여하는 방식. 이 규정은 2010년 이후 현재까지 9년 연속 사용되고 있다.
F1 그랑프리 초기의 점수 제도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1950년에는 전체 시리즈 7전 중 최고 점수를 기록한 4전 점수를 더해 순위를 가렸다.
1951~52년에는 시리즈 8전 중 4전 합계, 53년에는 9전 중 4전 최고 기록으로 드라이버즈 순위를 결정했다. 당시 순위별 점수는 1위 8, 2위 6, 3위 4, 4위 3, 5위 2점으로, 결승 5위 이내 드라이버들에게만 포인트를 주었다.
1960년에는 변화된 득점 규정이 도입되어 1위부터 6위까지 8, 6, 4, 3, 2, 1점씩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점수 제도는 1년 동안 사용되었고, 1961년에는 9, 6, 4, 3, 2, 1점으로 바뀌었다.
1967년 F1에서는 이전과 같이 1~6위까지 9~1점의 챔피언십 포인트를 부여했다. 다만, 시리즈 11전을 전후반기로 나누고, 전반 6전 중 5전, 후반 5전 중 4전 최고 성적을 합산해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순위를 가렸다. 이와 같은 포인트 규정은 1980년까지 이어졌다.
1981~1990년 F1의 기본적인 포인트 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시리즈를 전후반기로 나누지 않고, 최고 기록을 낸 11전 점수를 드라이버즈 챔피언십 포인트로 인정했다.
1991~2002년 F1은 1~6위까지 10-6-4-3-2-1점을 부여하는 포인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1991년부터는 모든 그랑프리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이 정착되었다. 이후 바뀌지 않고 이어진 이 규정은 2003년 들어 1~8위까지 ‘10-8-6-5-4-3-2-1점’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2009년까지 사용되었다.
한편, 1950년부터 1959년 사이에는 결승 중 패스티스트랩을 작성한 드라이버에게 별도로 1점의 가산점을 주기도 했다. 2014년 그랑프리에 도입된 최종전 더블 포인트 제도는 1년 동안 사용된 뒤 사라졌다.
박기현(allen@trackside.co.kr), 사진/KA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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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점 차이로 엇갈린 챔피언의 명암(1950~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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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 넘는그랑프리 역사에서 1점 차이로 챔피언의 명암이 갈린 그랑프리는 여덟 번이었다. 1958년에는 마이크 호손과 스털링 모스가 숙명의 대결을 펼쳤고, 페라리가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1961년 드라이버즈 우승컵은 필 힐이 거머쥐었다.

페라리와 BRM의 접전이 돋보인 1964년에는 모터사이클 챔피언 출신 존 서티즈가 그레이험 힐을 따돌리고 역사적인 기록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1976년 F1은 가장 극적인 시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임스 헌트와 니키 라우다의 1점차 혈전이 그랑프리 팬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이밖에도F1 역사에서 피 말리는 혈전의 흔적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가운데 단 1점 차이로 챔피언의 명암이 갈린 해는 여덟 번. 최종전 체커기가 나부끼는 순간에 다다라서야 우열을 가린 F1 역사 속 명승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불사조 니키 라우다, 76년 불운 극복하고 77년 챔프 등극

1958년 F1은 반월과 쿠퍼, 페라리가 선두 경쟁에 뛰어들었다. 마세라티가 철수한 뒤 이들 팀은 마이크 호손, 스털링 모스, 토니 브룩스를 앞세워 처음 생긴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7년까지 다섯 차례 챔피언 트로피를 거머쥔 후앙 마누엘 판지오가 사라진 무대에서는 쿠퍼-클라이맥스를 타고 나온 모스가 먼저 웃었다. 3년 연속 2위의 덫에 걸린 그에게 아르헨티나 개막전 우승은 서광과 같았다. 메르세데스, 페라리, 마세라티 팀에서 타이틀 3연패를 차지한 판지오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의 드라이버, 스털링 모스는 이번에도 불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시리즈 최종 11전 카사블랑카 그랑프리를 승리로 장식했지만, 드라이버즈 정상의 자리는 마이크 호손이 차지했다. 챔피언과 2위의 운명을 가른 점수는 겨우 1점(호손 42점, 모스 41점). 4승으로 분전한 모스는 소속팀 반월의 컨스트럭터즈 우승에 위안을 삼았다.

잭 브라밤과 함께 쿠퍼 팀의 전성기(1959~60)가 막을 내리자 페라리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페라리에 첫 월드 타이틀(1961년)을 안긴 경주차는 디노 156. 2.5리터 포뮬러 시대가 막을 내리자 V6 1.5리터 엔진을 재빠르게 투입한 페라리는 필 힐과 볼프강 폰 트립스가 합작한 4승 덕에 로터스를 제치고 컨스트럭터즈 정상에 우뚝 섰다. 드라이버즈 경쟁의 라이벌 역시 페라리 듀오였다.

하지만 필 힐과 폰 트립스의 접전은 어이없는 사고로 끝을 맺었다. 그랑프리 역사에 커다란 상처로 남을 비극의 장은 이태리 몬자 뱅크 트랙. 폴포지션에서 출발한 폰 트립스는 짐 클라크와 뒤엉키면서 일어난 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결국 몬자 우승자 필 힐(34점)이 미국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라이버즈 챔피언에 올랐고, 시리즈 최종 미국 그랑프리 그리드에 나서지 못한 폰 트립스(33점)는 그랑프리 역사의 뒤안길에 이름을 묻었다.

1964년 F1에서는 같은 영국계 존 서티즈와 그레이엄 힐 사이에서 뜨거운 접전이 벌어졌다. 페라리와 BRM의 대표 주자로 나선 두 선수의 점수 차이 역시 1점. 10전 중 6전 합계 점수로 순위를 가른 64년 그랑프리에서 2승 포함 40점을 기록한 서티즈가 챔피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힐과 서티즈의 라이벌전은 멕시코시티에서 판가름났다. 최종전을 앞둔 미국 그랑프리까지의 점수는 힐(39점), 서티즈(34점), 클라크(30점) 순. 레이스가 시작되자마자 선두 힐이 득점권에서 사라지자 서티즈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게다가 시즌 4승을 향해 순항하던 클라크마저 레이스 종료 2랩을 남겨두고 리타이어해 2위 체커기를 받은 서티즈가 굴러들어온 행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역전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존 서티즈는 모터사이클과 F1 세계 타이틀을 모두 보유한 역사적인 인물로도 기록되었다. 2년 연속 우승을 노린 클라크는 그레이험 힐과 재키 스튜어트 듀오를 내세운 BRM을 제치고 팀 로터스에 두 번째 컨스트럭터 왕관을 씌워주었다.

1976년 F1은 가장 극적인 시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임스 헌트(맥라렌, 69점)와 니키 라우다(페라리, 68점)의 1점차 혈전이 그랑프리 팬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75년 드라이버즈 챔피언 니키 라우다의 머신은 312T. 해체된 헤스키스 팀을 떠나 맥라렌에 들어간 제임스 헌트는 M23으로 첫 타이틀 도전에 나섰다. 두 드라이버의 첫 대결 결과는 라우다의 승리. 75년 마지막 라운드 미국 그랑프리를 폴투윈으로 장식한 라우다는 충돌 사고로 무너진 헌트를 제치고 먼저 1승을 낚았다.

헌트의 불운은 2전에서도 재현되었다. 개막전에 이어 2전 연속 폴포지션을 차지했지만, 예선 2위 라우다가 표창대 정상을 밟았다. 벨기에와 모나코, 영국 그랑프리 우승컵이 라우다의 품으로 들어가자 76년 드라이버즈 판세가 급격하게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프랑스 GP 우승으로 숨을 고른 헌트가 최종전을 마친 뒤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다. 라우다의 불행이 가져다준 행운 덕이다.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일어난 사고로 중화상을 입은 라우다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랑프리에만 참가하지 못했을 뿐,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해 이태리 몬자 서킷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귀전 성적은 페테르손, 레가조니, 라피테에 이어 4위.

이후 캐나다 모스포르와 미국 왓킨스 글렌 서킷을 제압한 헌트는 창설전으로 열린 일본(후지)에서 숙명의 라이벌 대결을 벌였다. 선두 라우다와 2위 헌트의 점수 차이는 3점. 예선 3위 라우다가 시작부터 대열 선두로 올라서는 저력을 발휘했지만, 안드레티와 드파예 옆에서 3위 트로피를 차지한 헌트가 1점차 챔피언의 감격을 누렸다.

이듬해 라우다는 5위로 구른 헌트를 멀리 따돌리고 두 번째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낚아챘다. 최악의 부상을 극복한 그의 인간 승리에 전 세계 F1 팬들은 ‘불사조’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박기현 기자 gokh3@naver.com

페라리 마사, 2013년 시트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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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팀 오너 루카 디 몬테제몰로가 최근 의미심장한 발언을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펠리페 마사를 대체할 드라이버를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을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몬테제몰로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 2년 동안 기대보다 저조한마사의 성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난해 마사가 낸 성적은 5위(6회)가 최고. 포디엄에는 단 한 차례도 오르지 못한 그는 2년 연속 드라이버즈 6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페라리 팀 동료 페르난도 알론소는 마사와 대조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1승 포함, 열 번이나 포디엄에 오르면서 드라이버즈 4위를 기록한 것이다. 2010년에는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며 시즌 최종전까지 페라리의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펠리페 마사의 최근 성적은 페라리 머신의 경쟁력을 고려하더라도 다소 실망스러운 수준. 이에 따라 2013년 마사의 행보는 올 시즌 성적에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몬테제몰로는 “지난해 젠슨 버튼은 매우 뛰어났다. 마크 웨버는 훌륭한 세컨드 드라이버였으며, 머신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지만 니코 로스베르크도 잘해주었다. 페라리 아카데미에서 성장한 세르지오 페레즈도 좋아 보인다. 이밖에 줄 비앙치 역시 더 발전했다”면서 여러 드라이버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몬테제몰로는 “자신의 첫 번째 선택은 펠리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월드 챔피언에 근접한 2008년과 같은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예전 페라리 팀 수장장 토드도 펠리페는 여전히 빠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을 양손에 들고 있는 몬테제몰로는 “펠리페에게 올 시즌은 매우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또 다른 뉘앙스를 남겼다.
“과거 펠리페는 종종 슈마허나 키미보다 빨랐다. 키미가 챔피언십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2007), 1년 뒤에는 아깝게 월드 타이틀을 놓쳤다. 내년 시즌에 좋은 모습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신뢰를 보낼 것이다.”
결국 펠리페 마사의 페라리 잔류에 대한 키는 올 시즌 성적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페라리에서 7년째를 맞이하는 펠리페가 몬테제몰로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평가는 당분간 유보해야 할 것 같다.
F1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그의 후임을 점치는 이들도 보인다. 지난 2년 동안 GP2에 출전하며 페라리 리저브 드라이버로 활동한 줄 비앙치를 비롯한 몇몇을 물망에 올려놓고 있는 것. 비앙치(22, 프랑스) 스스로도 내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상황이다. 그러나 루키를 곧바로 정규 시트에 앉히지 않는 페라리의 전력을 고려하면 2013년 페라리의 두 번째 시트를 차지할 드라이버를 벌써 점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편, 프리 시즌 테스트를 한 달 앞둔 요즘 각 팀들은 2012년 그랑프리카 론칭을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12개 팀 중에서 맥라렌(2월 1일)이 가장 빨리 새 경주차를 선보이고, 페라리는 맥라렌보다 이틀 늦은 2월 3일에 2012년 머신을 발표한다. 2월 6일에는 자우버 팀이 론칭을 준비하고 있다.
프리 시즌 첫 테스트 일정은 2월 7~10일. 헤레즈에서의 테스트에 이어 2월 21~24일과 3월 1~4일 사이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2, 3차 프리 시즌 테스트가 열릴 예정이다. 이밖에 5월 1~3일에는 무젤로에서 네 번째 테스트가 계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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