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 로스베르크에 이어 그랑프리 정상에 오른 핀란드 출신 드라이버는 미카 하키넨이다. 98~99년 F1 월드 챔피언, 미카 하키넨은 1968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태어났다. 조용한 성격의 그가 레이스에 데뷔한 것은 6세 때인 1974년. 여느 드라이버와 마찬가지로 카트를 통해 스피드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13년 동안 카트를 타면서 거둔 성적은 핀란드 챔피언십 5회 우승. 카트에서 기본기를 충실히 닦은 하키넨은 이듬해 포뮬러 포드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고국 핀란드와 스위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레이스에서 우승컵을 따내며 유럽 시리즈 7위를 기록했다.
이듬해 GM 로터스 시리즈에 진출한 미카는 89년부터 F3로 영역을 넓혔다. 데뷔 첫해 성적은 영국 F3 시리즈 7위.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90년 영국 F3를 평정하는데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다. 영국 남동부 주에 자리 잡은 웨스트 서리 팀 소속으로 90년을 맞은 하키넨은 시즌 9승을 거두며 F3 정상을 밟았다. 이밖에 마카오, 이태리, 독일 등 F3 최고 무대에서 우승컵을 낚아 F1행 직행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1991년, 포뮬러 드라이버들의 꿈인 F1 시트를 차지한 것이다.
미하엘 슈마허 제압한 ‘플라잉 핀’
하키넨의 F1 고향은 로터스였다. 그러나 미국 그랑프리를 통해 F1에 데뷔한 그는 16전 동안 겨우 2점을 얻는데 그쳤다. 92년에도 눈에 띄는 기록을 뽑지 못한 하키넨은 11포인트, 드라이버즈 8위로 F1에서의 2년을 보냈다.
93년 맥라렌 팀 테스트 드라이버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안드레티를 대신해 맥라렌 포드 머신의 핸들을 잡았다. 당시 맥라렌의 에이스 드라이버는 서킷의 천재 아일톤 세나. 맥라렌 유니폼을 입고 뛴 첫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세나에 앞서 예선 3위를 기록했다. 결승에서는 32랩째 일어난 충돌사고로 아깝게 리타이어했지만, 인상 깊은 주행을 펼쳐 파란을 일으켰다.
라이벌 미하엘 슈마허와의 격돌은 이 게임에서 처음 이뤄졌다. 베네통의 새별 슈마허는 93년 F1 14전을 우승으로 장식하며 하키넨과의 첫 대결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하키넨의 공격도 만만치 않아 이어진 일본 그랑프리에서 F1 데뷔 후 첫 표창대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성적은 당시 F1의 정상 세나와 프로스트에 이은 3위.
94년 마크 불룬델과 한 조를 이룬 하키넨은 맥라렌-푸조 머신으로 15GP에 출전해 시리즈 4위를 기록했다. 이해 드라이버즈 챔피언인 미하엘 슈마허에 한참 뒤졌지만 6차례 표창대를 밟아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탄탄대로에 접어든 하키넨에게 95년은 시련기였다. 시즌 마지막 호주 그랑프리 예선에서 시속 240km의 속도로 타이어 장벽을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연석을 타고 튀어 오른 하키넨의 머신은 빙그르르 돌면서 15m를 날아갔고, 충격의 여파는 하키넨의 숨통을 조였다. 싸늘해진 관중석은 한순간 94년 세나의 목숨을 앗아간 이몰라 서킷을 연상시켰지만, 구급대의 기민한 응급조치로 더 이상의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고로 하키넨은 머리를 심하게 다쳤으나, 다행히 빠르게 회복되었다.
96년 개막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그는 96, 97년 5위와 6위를 거두며 상위권에 머물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맥라렌에서의 2년을 마칠 무렵, 하키넨은 꿈에 그리던 표창대 정상을 밟았다. 97년 F1 최종전 유럽 그랑프리에서 동료 쿨사드와 함께 원투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승리는 앞서 달리던 슈마허와 빌르너브의 충돌로 인해 굴러 들어온 것이었지만 하키넨에게는 잊지 못할 우승이었다.
드디어 98년, 시리즈 16전 중 8GP에서 우승한 미카 하키넨은 세계 모터스포츠 정상을 정복했다. F1에 첫발을 디딘 이후 8년, 그랑프리 출전 112전만의 쾌거였다. 하키넨의 시리즈 우승은 98년 11월 1일 일본 스즈카에서의 극적인 우승으로 더욱 빛났다. 시즌 막판까지 미하엘 슈마허와 접전을 벌인 그는 최종전 피니시라인을 제일 먼저 밟아 라이벌의 콧대를 눌렀다. 결국 챔피언십 포인트 100점을 따낸 하키넨은 뒤따르던 슈마허(86점)를 여유 있게 누르고 감격스러운 드라이버즈 챔피언의 영예를 안았다. 그의 드라이버즈 챔피언은 핀란드인으로는 두 번째. 스승이었던 케케 로즈베르크에 이어 16년 만에 F1을 평정해 ‘핀란드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99년 F1 16전을 다시 한 번 제압한 하키넨은 2년 연속 그랑프리 우승을 일군 7명(이후 미하엘 슈마허와 페르난도 알론소, 세바스찬 베텔도 연패를 기록했다)의 드라이버에 이름을 올렸다. 시즌 5승에 챔피언십 포인트는 76점. 98년에 비해 떨어지는 성적이었지만 극적인 우승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라이벌 슈마허가 사고로 6경기를 쉬는 사이 페라리의 에디 어바인과 손에 땀을 쥐는 전투 끝에 얻은 월드 챔피언이었기 때문이다.
99년 우승 역시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 판가름났다. 반드시 우승해야 드라이버즈 챔피언 2연패를 거둘 수 있는 절박한 상황. 슈마허에 밀려 예선 2위를 기록한 하키넨은 출발과 동시에 번개작전을 펼쳐 선두에 나섰다. 이후 53랩 내내 스즈카 서킷을 휘어잡은 그는 슈마허를 5초 차이로 따돌리고 1위로 피니시라인을 갈라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을 열광시켰다. ‘페라리가 유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은 하키넨은 16전 중 11회 폴포지션을 따내는 대기록과 함께 F1 2연패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미카 하키넨의 2000년은 밝지 않았다. 시즌 4승, 종합 2위의 성적만 놓고 보면 나무랄 데 없었지만 슈마허의 거센 공격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슈마허가 일찌감치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확정지은 것과 달리 시리즈 5위로 한 걸음 물러났고, 이후 2002년 잠정 은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트랙을 떠났다. 맥라렌을 떠나면서 고국 핀란드의 기대주 키미 라이코넨을 추천한 하키넨은 플라잉 핀(Flying Finn)의 명성을 팬들의 가슴에 남긴 채 F1 커리어를 접었다.
미카 하키넨
국적 핀란드
생년월일 1968년 9월 28일
F1 데뷔 1991년 미국 그랑프리
그랑프리 출전 165GP
챔피언십 포인트 420점
우승 20승
폴포지션 26PP
포디엄 51회
드라이버즈 챔피언 1998, 1999
박기현 gokh3@naver.com ㅣ 사진 LAT Photograp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