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에버랜드 스피드웨이. 당시 국내 모터스포츠의 메카로 자리잡은 그 곳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포뮬러 레이스를 볼 수 있었다. 2004 BAT GT 챔피언십 F1800 시리즈에서 눈에 띈 이들은 ‘영 드라이버’ 돌풍의 주역으로 떠오른 황진우, 최해민, 정의철. 렉서스 레이싱팀 황진우는 GT1, 그리고 최해민과 정의철은 오일뱅크와 인디고의 라이벌 경쟁이 대세였던 F1800에서 주목할 드라이버로 꼽혔다.
1년 뒤 세 선수는 모두 걸출한 성적을 거두었다. 황진우는 2005 GT1 시리즈 7전 중 4승을 기록하며 챔피언 고지에 우뚝 섰고, 최해민과 정의철도 F1800 1, 2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9년이 흐른 2013년. 세 선수는 모두 국내 주요 자동차경주 정상 주자로 발돋움했다. 황진우는 2013 헬로비전 슈퍼레이스 슈퍼6000 챔피언 후보. 최해민은 GT 선두를 달리고 있고, KSF 제네시스 쿠페 10 클래스에 출전한 정의철은 최종 7전을 마치기도 전에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팀원 모두의 열정으로 꿈 하나를 이루었다”
2004년 F1800 4전에서 포뮬러 레이스 데뷔 8전 만에 첫 우승을 기록한 정의철.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을 경신한 그는 카트로 레이스의 기본기를 다지기 시작한 유망주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만 보면 무조건 좋았다”고 밝힌 정의철이 카트 레이싱으로 눈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정의철이 있기까지 그의 아버지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인천 연수동에 카트장이 생겼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아들을 데려간 정의철의 아버지는 1999년 봄, 13세 정의철을 60cc 레저 카트에 태우기 시작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너무 재미있어 카트를 타자마자 푹 빠지게 되었다”는 정의철. 재능이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자양분 삼아 열심히 연습한 그는 곧 발보린 카트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30명의 참가자 중 3위를 차지할 정도로 가능성을 보였다.
변변한 카트장이 없던 시절이어서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인천-원주를 오가며 연습에 매진한 정의철은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카트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한국자동차협회 주관 KKC 시리즈에 참가한 것이다. 2003년에는 카트를 졸업하고 포뮬러1800 경주차로 갈아탔다. 데뷔전은 BAT GT 챔피언십에 포함된 F1800. 결과는 리타이어였는데, 결승 출발 직전 시동을 꺼뜨린 것이 화근이었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2004년은 정의철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레인 레이싱에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그는 실력파 드라이버들이 즐비한 F1800 4전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F1800 예선 1~4위는 조항우, 최해민, 안석원, 코노미 심페이. 5그리드에 서서 스타트라인을 벗어난 그는 차분하게 결승에 돌입했다.
선두 조항우의 쾌속질주. 최해민과 코노미 심페이 뒤에서 안정적인 주행을 펼친 정의철은 앞선 2, 3위가 동시에 스핀하자 순식간에 2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조항우마저 트랜스미션 트러블로 리타이어한 뒤 선두를 물려받은 정의철은 2위 안석원을 2초 차이로 제압하고 F1800 데뷔 후 첫 우승을 기록했다.
이후 국내 자동차경주에 참가하다 군 제대 후 DM레이싱 소속으로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에 출전한 정의철은 올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12 KSF 제네시스 쿠페 챔피언십 하반기 4전 중 3전에서 2, 3위 포디엄에 오른 그는 서한-퍼플모터스포트로 이적한 첫 해에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열정이 충만한 팀원들, 그리고 이전부터 호흡을 맞춰온 이민철 치프 미캐닉과 한 배를 탄 덕에 쾌조의 스타트를 할 수 있었다. 2013 KSF 제네시스 쿠페 10 클래스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한 그는 2전 4위에 이어 3전에서 다시 포디엄 정상을 밟았고, 4전 2위, 5전 우승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더블 라운드로 개최된 시리즈 6전을 5위로 마친 정의철은 마침내 제네시스 쿠페 10 시리즈 챔피언 고지에 우뚝 서는 쾌거를 이루었다.
“KSF 데뷔 2년 만에 챔피언이 되어 더 없이 기쁘다. 새로운 팀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 만족스럽다. 팀원 모두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챔피언이 된 소감을 이렇게 밝힌 정의철은 연초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올린데 대해서는 담담한 의견을 밝혔다.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성적이다. 그러나 우리 팀원 모두 열심히 준비했고, 그 결과는 좋았다. KSF 강팀 쏠라이트 인디고, 아트라스BX 레이싱팀과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준 것은 두 팀에 뒤지지 않는 팀의 기술력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정의철은 “팀 스태프 모두에게 우승의 영광을 돌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챔피언이 된 가장 큰 원동력이 팀원 모두의 덕분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력을 갖춘 경주차를 탈 수 있었다는 것은 소속팀 스태프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린 결과라는 뜻이다. 팀 대표의 남다른 열정은 정의철과 서한-퍼플모터스포트의 우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공헌. 이 모든 것들이 끈끈하게 얽혀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는 정의철은 “서한-퍼플모터스포트 팀에서의 첫 경기 우승이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은 인제 스피디움에서의 6전 결승에서 일어난 최명길과의 접전이었다. 조금 더 마인드컨트롤을 잘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욕심을 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얘기다.
올 시즌 최고의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이에 대해 “한 두 사람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상의 실력과 오랜 경력을 갖춘 쏠라이트 인디고와 아트라스BX 듀오는 언제나 어려운 상대들이다. 배울 점이 많은 베테랑 선수들이다”고 말했다.
새로운 팀에서의 첫 해를 풍성하게 수놓은 정의철은 내년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에게 올 시즌은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이 될 것이다.
박기현(allen@trackside.co.kr), 사진/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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